시각장애인 독경(讀經)이란?
맹인독경(盲人讀經)은 맹인이 경문(經文)을 읽으며 신에게 재앙을 물리치고 복일 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도교의 옥추경, 불교의 천수경 등과 같은 여러 경문(經文)을 암송하여 복을 빌거나 질병 치료 등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신앙 의례이다.
조선시대 서울 4대문 안에는 무당이 살 수 없었고 굿도 도성 밖에서만 했으며 승려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맹인 독경의례의 경우 예외적으로 17세기 후반까지 국행기우제로 열리는 등 궁중과 양반층 · 민간의 대표적인 의례로 행해졌다. 맹인독경은 20세기 초반까지 전국에 분포했으나 현재는 급격히 줄어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독경에 종사하는 일부 태사(太師, 맹인세계에서 독경하는 사람을 지칭)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서울의 독경인들은 당주 1명(경쇠를 치며 독경을 이끌어가는 사람)과 고수 1명(북을 치며 독경의 박자와 음률을 조절하는 사람), 협송인(함께 참여하는 독경인) 등 3명 이상이 참가하여 10가지 종류의 장단으로 독경의 흥을 돋아 준다. 이러한 독경 방식은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 있어서도 다양한 무형 유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산물이 되었다. 이렇듯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맹인독경’은 2017년 1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시각장애인 독경(讀經)의 역사
고려 때부터 시각장애인 점복자들은 도교의 한 유파로 독경을 하여, 민간의 제반사에 관여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점차 독경 의식은 가뭄과 홍수에 대한 기우제와 기청제로 발전하면서 국가를 위한 의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맹인독경’은 시각장애인들만의 독특한 독경문화를 형성하였고 민중의 하층에서부터 고위 양반계층과 왕실에 이르기까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고대 하·은·주 시대에 시각장애인이 북을 쳐서 일, 월식을 막았고 원나라 때에도 시각장애인이 일, 월식에 정통했으며, 조선시대 관상감의 일, 월식 술자 역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물 밀듯이 들어온 개화사상에 의해 미신으로 배척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독경에 위기가 왔다. 이 어려움을 이겨 내고 오늘날까지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문생청’이라는 시각장애 역학인 단체를 중심으로 서로 돕고 살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업권을 수호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 가는 단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는 조선시대 시각장애인들의 단체 통명청(通明廳)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맹인역리대성교(朝鮮盲人易理大成敎)를 계승하고 있는 단체이다.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 서울지부는 1978년부터 서울 성북구 정릉동 소재 회관에서 연례적으로 독경행사를 개최하는 등 서울맹인독경을 활발하게 전승해오고 있는 단체로서,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48호 서울맹인독경의 보유단체로 인정받았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8호 서울맹인독경
2017년 1월,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 서울지부와 故 채수옥 선생이 각각 보유단체와 보유자로 인정받아 시각장애인 독경을 다시 알리고 보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협송인 이은영, 고수 故 채수옥, 당주 박동금
보유자 故 채수옥 선생(1940~2022)은 3세 때 홍역으로 실명하고 15세에 최재현 스승 문하에 입문하여, 각종 경문과 독경의 다양한 의례 등을 익히고 오롯이 점복과 독경만으로 전 생을 살았던 전문 독경인이다.
중국의 고대 하·은·주 시대에 시각장애인이 북을 쳐서 일, 월식을 막았고 원나라 때에도 시각장애인이 일, 월식에 정통했으며, 조선시대 관상감의 일, 월식 술자 역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물 밀듯이 들어온 개화사상에 의해 미신으로 배척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독경에 위기가 왔다. 이 어려움을 이겨 내고 오늘날까지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문생청’이라는 시각장애 역학인 단체를 중심으로 서로 돕고 살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업권을 수호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 가는 단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는 조선시대 시각장애인들의 단체 통명청(通明廳)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맹인역리대성교(朝鮮盲人易理大成敎)를 계승하고 있는 단체이다.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 서울지부는 1978년부터 서울 성북구 정릉동 소재 회관에서 연례적으로 독경행사를 개최하는 등 서울맹인독경을 활발하게 전승해오고 있는 단체로서,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48호 서울맹인독경의 보유단체로 인정받았다.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48호 ‘서울맹인독경’
전통적으로 맹인은 세상을 볼 수 없는 대신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여겨 점복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관상감의 점복을 담당하는 명과학 부서의 10명 내외의 종사자들은 모두 맹인이었고, 그 우두머리를 국복이라 했다. 이러한 점을 치는 이로가 같은 종교적 행위의 연장에서 이들은 일종의 종교의례인 독경도 했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의 민간신앙 의례는 무당의 굿과 맹인의 독경,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게 된 것이다.
서울맹인독경의 역사는 적어도 고래시대 맹승의 존재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가의 기우제 같은 데 동원되었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도서 4대문 안에는 무당이 살 수 없었고, 무당굿은 도성 10리 밖에서만 허용되었다. 승려는 도성 출입 자체가 제한되었다.
그러나 맹인독경인들에게는 조선 전기까지도 도성 안에 명통사란 절을 마련해 주고 경제적 지원을 하며, 기우제 등 국가적 행사에 동원했다.
또 도성 안에서의 민간 신앙 의례로 ‘고사’도 인정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에서는 정초나 10월 상달에 고사 형태로 이뤄지는 맹인의 안택경이 서울의 대표적 민간신앙 의례가 되었다.
맹인독경은 기우제와 같은 국가의 행사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부터 이미 3명 이상이 하는 독경 방식을 갖게 되었다. 한 명이 당주가 되어 경쇠를 흔들며 독경을 주도하고, 한 명이 고수가 되어 양손으로 북채를 잡고 치며, 나머지 사람들은 당주가 하는 소리를 받아 반복하는 협송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 결과 3~108명에 이르는 독경을 할 수가 있었다. 또 당주, 고수, 협송인들로 이뤄져 있어 독창, 선후창, 합송 등의 여러 독경의 방식이 가능하여 독경의 장단도 3·2·3·2장단, 3·2·3장단, 12박, 6박, 4박, 2박 장단 등 5종류가 있고, 초장, 중장, 종장 등의 빠르기로 10종 정도의 장단들이 있다. 이러한 서울맹인독경의 방식은 현재 다른 지방에서 1명이 4박 장단 위주로만 하는 독경 방식과 크게 차이가 난다.
경에는 안택경, 병경, 천도경 등 여러 경우에 따른 경들이 있다. 안택경은 ‘분향주-고향게-축원-부정풀-천수대다라니-배청-창사성-각집게-명당경-도액경-언별-연수경-성주대잡이-성주선경-자음성-제석선경-용허경-산물진언’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언별은 우리말 가사를 합송하는 것이며, 성주선경과 제석선경은 당주, 고수, 협송인 3명만이 일어서서 부르는 우리말 축원덕담들이다. 이 외 병경은 옥추경을 거듭 외고, 신장대에 신장을 내려 병의 원인인 사귀 들을 잡아가두는 의례를 한다. 천도경에는 천지팔양경을 주로 외고, 사왕선경 같은 선경을 하기도 한다.
맹인독경
시각장애인 독경(讀經) = 맹인독경(盲人讀經)
당주
당주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던 시각장애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봉상시 태상제 안에 있는 맹제, 독경제, 왕이 처소를 옮길 때의 ‘맹인 독경제’ 등을
주관하였던 시각장애독경인 이다.
도교
도교는 수련을 하는 전통 신앙이다.
유, 불과 함께 도교를 숭상하던 시각장애독경인들은 도사도 아니고 도복도 입지 않았으나 이들을 맹승으로 불렀다.
맹승들이 제례를 행할 때는 독경이나 축원을 하였고 이들이 읽은 경에는
금단경, 영보경, 연생경, 태일경, 옥추경, 진무경, 용호경, 용왕경, 옥갑경 등의 독경과 팔양경, 천수경 등의
불경이 있고 그중 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것은 옥추경이였다.
옥추경, 용호경, 천수경, 팔양경은 지금까지도 주로 읽혀지고 있는 경문이다.